라디오 팟캐스트 - 라디오 좌파명리 시즌4

[사연 접수] 을사일주, 밟아도 밟히지 않는

식상난리부르스 | 2020.07.25 21:43 | 3,792

안녕하세요, 기다리던 을사일주 사연 신청합니다. 

외할아버지가 명리를 공부하셨다는데, 최근 절연했던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 또한 철학관을 운영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와 저의 명식을 풀어놓으신 메모를 발견했는데, 웬걸 제 시주를 ‘진시생’으로 잘못 알고 계셨더라고요. 여하튼 그걸 계기로 원래도 관심 있었던 명리에 대해 공부할 마음이 생겨 부지런히 좌파명리와 철공소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시즌 1을 완강하고 사연을 보냅니다. 
강헌 선생님의 주옥 같은 말씀들을 줍줍 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기에도 가끔은 얄미운 죽돌님…여러분 을목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다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ㅠㅠ 좌파명리 하도 들어서 이젠 이웃집 언니 같이 친숙한 낯선PD님과 냉철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지산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사연 양식 기준은 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용이 많이 길어요. 만약 사연이 소개된다면 편집 하실 거 생각하니 괜히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1. 식상난리부르스 / 여자 / 양력 / 1984.03.12 19:40분 갑자년 정묘월 을사일 병술시 / 그래픽 디자이너 겸 여행 작가 

2. 성향

을사일주 여자는 예쁘다지만 전 안 예쁩니다. 100명 중 7명 정도에게는 어필할 수 있는 매력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내 남자가 될 것도 아닌데 그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눈빛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어딜가나 듣는 것 같습니다. 

뼛속까지 긍정으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왼쪽 눈이 실명이 되었는데도 ‘눈이 두 개라서 천만다행이다’ 라고 생각한다던지, 남편이 일하다가 몇백 만원의 손해가 나는 상황에서도 ‘에이 그 돈? 껌이야. 금방 벌어 걱정마’하며 남편을 위로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굉장히 독립(독단)적이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평소 누구도 내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요인도 나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것을 불허한다. 이것이 저의 진짜 속마음입니다. 밟아도 밟히지 않는 을목의 끈질긴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시작할 때는 준비 기간이 꼭 필요합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납득하고 알때까지 책을 보면서 공부합니다. 웬만한 것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급하고 목청이 끝내줍니다 욱하는 기질도 만만치 않습니다(아..내 심장). 자기 주장 강하지만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그자리에서 바로 사과합니다.  앞뒤가 똑같아서 차라리 앞담화를 하는 편입니다. 통근한 상관이 성격적으로 미치는 힘이 정말 센 거 같습니다. 약속시간 1분 늦어도 늦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후배나 아랫사람에겐 다정하지만 “뭔가 힘을 가진 새끼들에 대한 원천적인 불인정(강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니가 사장이면 다냐. 이럴거면 관둔다. 사표나 받아라”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그럼에도 10년째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단점은 속으로 사람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사교성 있어 두루 친해보여도 스스로 규정한 친밀도로 사람을 나눕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는 없지만 은근히 사람을 낮춰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과 있으면 기가 빨리는 스타일이라 난 내향적 인간이야 하며 규정하려해도 정신 차리고 보면 모임의 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내 에너지 조금 덜 쓰기 위해 1:1 관계를 가장 선호하는 편입니다.  마음이든 돈이든 나누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지만, 혼자 잘해줘놓고 고맙다는 말은 꼭 들어야 합니다. ‘말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 제일 좋아합니다. 상대방에게 그런 말 못 들으면 마음속으로라도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웬만하면 적을 두려고 하지 않지만 한번 아니다 싶은 인연은 칼 같이 끊습니다. 헤어진 남자친구? 그게 뭔가요. 절대 다시 보지 않습니다. 

센스가 있어야만 잘 할 수 있다는 세 가지. 패션, 요리, 외국어(영어-일본어). 다 좋아하고 잘합니다. 배워서 잘하는게 아니라 눈대중과 촉, 그리고 감으로 잘해보이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아요…영어나 일본어도 진짜 잘하는게 아니라 발음이 좋아서 잘해보여요. 

일지에 목욕, 나체도화라 꾸미는 것 좋아하고, 화려한 것 좋아하고, 돈 쓰는 재미로 삽니다. 그런데 또 시지 정재에 묘라서 그런지 돈과 관련한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팬티에 구멍나도 안쓰고 모으는 경향이 있어요. 적금이든 예금이든 강제성을 두고 모으면 돈만큼 쉽게 모이는게 없더라고요. 가족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아요. 빚 갚느라 대학교도 중퇴하고 뒤늦게 다시 공부 시작한 언니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고요. 부족한 인성 채우기 위해 어머니 많이 챙깁니다. (제가 딱히 챙기지 않아도 부자 남친 만나 제일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계시네요.)

건강상으로는 눈과 뼈가 문제입니다. 각각 화와 목이지요. 눈은 한번 수술 이후 크게 문제가 없는데 특히 뼈로 잔병치레가 많습니다. 2-3살 때 팔이 두번이나 빠져 체육관에서 맞춘 적이 있고, 20대 후반부터는 무리하게 헬스를 한 탓으로 계속 무릎 통증이 있었으며, 18년 무술년에는 꽤 오랫동안 손목 통증으로 고생한 뒤 헬스는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얼마전 극심한 목 통증으로 병원을 갔더니 심각한 일자목이라고 하더라고요. 자세 교정을 할 수 있는 필라테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심리적 안정감이 높아졌습니다. 

 

3. 과거 이력 

- 병인대운 2세~11세 

명리를 공부하셨다는 외할아버지가 저와 계묘일주 언니 사주를 보고는 언니는 그야말로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서 가야하는 공무원 스타일이라면, 저는 남의 운까지도 뺏어서 두 세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갈 아이이니 그냥 냅두라고 하셨답니다. 그 때문인지 언니는 조금만 성적이 낮아도 매를 들었는데, 전 그냥 말그대로 방임, 방목으로 키우셨어요. 제가 뭐 하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항상 “좋다면 해라. 대신 책임은 스스로 지는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세 계유년에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11세 갑술년에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전학을 여러번 다니면서 성격은 더 활발해졌고 이후로는 고등학교 때까지 매해 학급 임원을 했습니다. 

 

- 을축대운 12세~21세 

미술로 두각을 나타낸 건 을축대운이 들어서부터였고, 미술대회서 받은 상장이 차고 넘쳤습니다. 정말 이상한 건, 미술학원 선생님들께서 하나같이 “넌 재능이 있다. 홍익대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들이 “넌 재능이 있어. 멋진 아티스트가 될거야”라고 말해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여하튼 전 초등학교 때부터 뭔지도 모를 대학교를 목표삼아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소운으로, 축 편재가 들어온 때부터 저희 집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IMF 이후 전기 관련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회사가 힘들어졌고 부모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15세 무인년, 아버지가 6개월 정도 생활비를 주지 않았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간 미술대회에서 굉장히 큰 상을 받게 됐고,  상금으로 받은 70만원으로 밀린 육성회비나 공과금을 내면서 저는 “어떻게든 미술을 해야겠다. 가진 재능으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16세 기묘년에 결국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언니가 서울로 대학을 간 이후 18~19세 신사년과 임오년, 2년 동안 아버지와 살면서 동거녀가 두번이나 바뀌었고, 두번째 오셨던 분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술에 쪄들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권총을 들고 다니며 우리 여기서 다 죽자는 말을 심심찮게 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두분이서 몸싸움을 했는데 자고 있는 저를 깨워 보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어요. 단지 보게 해서 그 폭력을 방조하게 만들었습니다. 말려도 보고 발악도 해보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싸움에 모두가 지쳐갔습니다. 집에서 잠을 잔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미술학원이 끝나고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불이 꺼질때까지 들어가지 않았고 새벽까지 PC방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고3 수능 100일 남겨두고, 살던 집이 압류되었습니다. 아빠는 작은 원룸에 들어가고 전 친구집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미술반 친구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얼마간의 돈을 받고 저에게 방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집도 매일 부부싸움을 하는 집이었어요 하아. 

여기서 정신줄 놓으면 끝이라고 생각했고, 다행히 비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고, 서울 상경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2년 간 문제집 산다며 아버지 돈을 삥땅쳐서 저축을 합니다. 100만원 남짓을 모아 고3 수능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 미술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결과가 좋지는 않았어요. 서울의 한 국립대에 추가로 붙은 것이 다였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엄마와 언니랑 살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부담이었던 엄마는 국립대에 가길 원했어요. 전 “내가 거기 가려고 태어난 줄 알아?” 하면서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재수생활을 했습니다. 미술학원비만 엄마에게 도움을 받고 고시원 총무일과 화장실 청소를 해가며 생활했습니다. 공부 학원 다닐 돈은 없어 4시간씩 자며 독학했어요. 공부머리가 없지는 않아서 수능점수도 크게 올랐습니다. 그렇게 21세 갑신년에 홍익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돈을 벌 수 없을 것 같아 디자인과에 입학했습니다. 

 

- 갑자대운 22세~31세 

대운으로 인성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습니다. 이혼을 하면서 엄마가 저를 버린 것만 같았거든요. 아버지보다 엄마가 더 미웠습니다 엄마와 사는 동안 말끝마다 “엄마가 나 키운거 아니잖아”라고 하며 온몸으로 미워했습니다.  정확히 대운이 바뀌는 22살의 어느 날 엄마가 사과하시더라고요. 그때 너무 미안했다고 어린 너희들 마음을 생각 못했다면서요. 나만 살자고 이혼한 것 같아 내내 미안했다고요. 그 한마디로 용서가 되더라고요. 지금은 어머니와 둘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막상 대학을 들어가서는 너무 많은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10대 전반에 걸쳐 거의 유일무이한 목표를 이룬 다음에 온 허무에 빠지기도 했고, 미대는 돈이 많이 들어가기 떄문에  재정적 격차가 결국 실력의 차이를 만들어내더라고요. 대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사실 아르바이트 한 기억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너무 과분한 대학교를 온 것 같아 후회 정말 많이 했습니다. 돈으로 위축된 마음이 더더 작아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치매 걸린 외할머니를 엄마가 모셔야했고, 아버지가 언니 앞으로 빚을 져서 언니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아버지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넷이서 작은 옥탑방에 살았습니다. 곰팡이가 그득그득하고, 바퀴벌레와 귀뚜라미가 출몰하는 그곳에서 제가 신묘년 외국으로 나가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23세 병술년에 2달 동안 인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언젠가는 외국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고, 대학교 4학년 때인 기축년에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제발로 대학교 상담센터를 찾아가 1년간 상담을 받았습니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습관적으로 잠수를 타던 저는 상담을 받고 정말 많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27세 경인년에 학교를 겨우 졸업했습니다. 그 해에 저는 왼쪽 눈이 망막박리 되어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도근시라 자연 박리 되는 것을 그저 눈이 나빠지는 줄로만 알고 나중에 라식해야지 했었는데 어리석었죠. 지금도 왼쪽 눈은 실명상태 입니다. 빛만 감지할 뿐 형태 인식은 되지 않아요. 오른쪽 눈에 기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른쪽 눈으로 살아갈 수 있다며 장애인 등급 신청에는 매번 떨어집니다... 저는 졸업을 하고 백수로 놀면서도 한국에서 취업할 생각은 없었어요. “난 무조건 외국으로 갈거야.” 지금 생각해도 앞뒤 계획없는 무대포였어요. 의식적으로 고립된 수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일자리를 열심히 찾은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는 친구가 정부 지원 사업으로 해외 인턴을 뽑는다더라는 말을 듣고, 유일하게 편집 디자인 인턴 공고가 난 기업에 원서를 냈고, 28세 신묘년 신묘월에 중동으로 일을 하러 갔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국 회사였고, 회사 규모가 작아 일당백이 필요했기에 디자이너로 들어갔지만 기획, 사진, 글을 쓰는 등 나중에는 필요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사실 나중에 직급이 높아지다 보니 글을 쓰거나 기획하는 일의 비중이 더 높아졌습니다. 직원 한 명을 한국에서 데려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에  열일 마다않는 저의 연봉은 해마다 크게 인상되었습니다. 


- 계해대운 32세~  

외국에서 만난 친구, 후배는 현재도 저의 든든한 응원군입니다.  사진을 찍는 친구였는데 제게 여행책을 같이 써보자고 권유를 하기 시작헀습니다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강한 인성대운이 와서 그런지 결국 하게 되더라고요. 보통은 출간기획서를 글로 정리해서 내는데 저는 디자인을 입혀 출간기획서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거의 모든 한국의 여행책 관련 출판사에 출간기획서를 보냈고 다행히 여려곳에서 연락이 와서 그중 한 곳과 계약을 하고 본격적으로 제가 사는 나라의 여행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퇴근하고 새벽 2-3시까지 글쓰고 출근하면서 지냈습니다. 

회사 생활 5년 차에 디자인을 더 깊게 공부하고 싶었고 외국 대학원을 가고 싶은 마음에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고, 우선 한국에 들어가서 여행책 작업을 마무리한뒤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큰 마음먹고 사표를 냈는데 수리가 안됐어요. 오히려 일정부분 일을 줄테니 한국가서도 일을 해주길 바랬죠. 오히려 월급을 더 받으면서 집에서 일할 수 있게 된거죠.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지만 어머니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많이 아프셨어요. 걷지도 못하실 정도로. 다시 외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결혼하고 싶은 남자친구도 생겨서 이래저래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남자친구와는 17년 정유년에 여러가지 이유로 헤어졌습니다. 

강력한 수 대운이 오면서 저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지난 10대 20대를 몸에 힘을 꽉 주고 경직되게 살았다면 계해대운 들어서부터는 오히려 나 이렇게 게으르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탈하게 살았습니다. 그사이에 첫번쨰 책을 냈던 출판사와 다른 나라의 여행책 작업도 하게 되면서 외국으로 왔다갔다 했지만, 예전만큼 열심히 살지 않는 느낌이 들었어요. 불살러야만 제대로 사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가 작년 기해년에 병신일주 남편을 만나 1년 남짓 연애하고 정관이 들어오는 경자년 올해 초에 결혼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온다고 하나요? 
결혼하고 곧바로 17년간 연을 끊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그동안 보지 않은 것에 얼마간은 후회도 하고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남편 덕분에 마음을 잘 추스릴 수 있었어요. 남편은 아이 없는 재혼이고 심리상담사입니다. 8년 전 이혼한 뒤에 막 살아서 모아놓은 돈도 없이 제가 살고 있는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남편을 만난 지 한달 만에 친구들에게 이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가 그놈 사기꾼 같다고 저보고 정신차리라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결혼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저는 흙 속에 파묻혀 아무도 꺼낼 생각 없던 진주를 발견했다는 것을요. 남자들을 그지핫바리로 보는 제가 유일하게 무시하지 않고 존경할 수 있는 인품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알고 무엇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도 즐겁습니다. 속궁합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희는 부족한 수 기운을 그렇게 채워나가고 있뜹니다으아으아으. 둘다 나이가 있어서 걱정이지만 아이도 준비하고 있고요. 그리고 시너지랄까요. 남편은 저랑만 있으면 꼭 상담 신청 전화가 옵니다. 결혼하고 일이 많아져 부쩍 바빠졌어요. 저 또한 10년 동안 같은 일만 해오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고, 특히 한국에서는 일해본 적이 없어 백그라운드가 상당히 약한 편이었는데요. 남편의 엄청난 응원으로 1인 디자인 사업장(시각 디자인-홍보물 등의 작업)도 내고 그림도 그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남편과 보내는 일상을 그리는 부부툰을 연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19금 쪽으로는 저희가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부부 문제와 관련된 이슈들을 그림으로 그리면 좋지 않을까 구상하고 있습니다. SNS로 올리다가 잘되면 유튜브로 옮겨가는 상상도 해봅니다. 돈 벌어서는요. 3층 짜리 주택을 짓고 싶어요. 1층에는 카페를 겸한 상담소, 2층에는 저의 작업실과 작은 지역 커뮤니티 공간, 3층 주거 공간 이렇게요. 

 

3. 질문

1 용신 잡기, 식상이 없는 삶은 슬프다? 

수가 고립이고 화로 둘러싸인 일간 을목을 생해주니 건강 용신인거 같고, 조후나 억부로 행운용신을 잡을 때도 뜨겁고 과다한 화를  차갑게 설기해줄 수 있는 수를 용신으로 잡을 수 있을거 같은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묘술합화화로 토와 목마저 화의 기운을 가지면서 그야말로 불바다가 되는데 저는 이 식상의 힘으로 살아왔던 거 같아요. 수 대운이 들어오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안정을 찾았지만, 제 마음속으로는 마치 그 안정을 거부하는 것 같아요.  강헌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식상이 없는 삶은 슬프다고. 화 식상을 설기시키며 살려니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1-1

기구신이라도 식상생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알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제 천직인 것도 알고 있어요. 지금은 괜찮지만 한쪽 눈만으로는 디자인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노안도 곧 올테고요. 만약 제가 완전히 다른 직업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이후 20년 간 인성운이 계속 들어오고 귀문이 있으니 심리상담이나 명리학 공부도 생각해봤고요.  인성운에 토 재성이니 부동산 공부를 해서 파이프라인을 만들어 고정 수입을 마련해 놓는 것도 생각해봤어요. 

 

2. 부부, 상생을 위해 서로에게 무엇을 해야할까요? 

남편은 정사년 신해년 병신일 신묘시 생입니다. 저와 남편은 일지합, 월지합, 월간충 등 여러가지 합과 충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일지 사신합으로 수가 되니 둘에게 부족한 수를 채울 수 있는 관계로 해석했는데 맞나요? 특히 남편 시지 목 정인 고립인데, 목이 많은 제가 그걸 채워주고 있는거 같아요. 가끔은 제 자식같기도 합니다. 또한 제 용희신을 수금으로 잡는다면 저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금을 남편이 많이 가지고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요. 이러한 해석은 너무 1차원적인 걸까요? 남편은 뼛속까지 상담사이고 그일을 계속 할 것이지만, 다재신약에 특히 일지 편재라 재주와 호기심이 많아서 취미가 한두개가 아니예요. 옆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관건일 거 같은데 자기 일은 알아서 잘하니 그냥 냅둘까요. 편재 자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언니와 엄마 사주도 남깁니다. 
 

엄마 : 기해년 무진월 병인일 임진시

언니 : 임술년 기유년 계묘일 임술시 

Jk32022.12.30 19:49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도 을사일주인데 비슷한 면이 많아 신기하네요.
저도 홍대 미대 (순수)재수해서 입학했다가  졸업하고 지금은 디자인일 하고있습니다.
뭐 일이나 학교 뿐 아니라 삶에서도 비슷한 면이 많은거같아서 신기하네요 ㅎㅎ

이스턴샤인2020.07.27 01:16

안녕하세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화 전왕은 아니신가요? 그리고 연월주 도화는 맞는데 일지 도화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지지에 자묘유 만 있다보니 도화를 좀 알아요 ㅋㅋ)

식상난리부르스2020.07.27 10:52

안녕하세요 이스턴선샤인님,
방송에 나온 선생님의 사연 재밌게 들었습니다~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것 처럼 예전 사주를 봤을때 화 전왕으로 보고 화 용신을 잡아주신 분도 계셨었는데요. 공부를 좀 해보니 득령은 했지만 실지 실세 하여 약간 신약한 사주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대운의 흐름을 봤을때 제가 전왕이라면 계해대운이 이렇게 편안할 리가 없을 거 같은데 궁금해하며 사연 올렸습니다ㅎ
일지 도화가 성립하지 않지만 일지 목욕을 나체도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렇게 표현했는데요. 아닌걸까요? 저도 배움이 짧아서 부족한게 많습니다~

이스턴샤인2020.07.27 16:18

아 그렇군요~ 본인 스스로가 더 잘 아실테니 전왕은 아닌가 봅니다. 저는 묘술합도 되어 화식상 전왕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여쭤봤습니다.

일지 상관의 목욕은 신해일주와 을사일주 인데 끊임없이 발전하는 재주로 들었던 것 같아요~ 재주로 생각하면 도화적 의미도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