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팟캐스트 - 라디오 좌파명리 시즌4

[사연 접수] 목이 강한 신미 일주

BLReine | 2020.08.28 22:54 | 944
안녕하세요. 망설이다가 사연 올립니다.

제가 강헌의 좌파명리를 접하게 된 것은 2016년 부터니까 벌써 4년이 되어 오네요.
그 해에 저는 운명적 사건을 겪습니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갔거든요. 2015년 가을에 발병하고, 겨우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넋이 나간 듯 몇 달을 보내다가, 끌리듯 명리학 관련 책, 팟캐스트 등을 접하게 되었고, 좌파명리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신자라 내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제가 끌리는 유일한 컨텐츠였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양력 1973년 2월 4일 사시 혹은 진시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가, 새벽에 배 아파 병원 가서 낮이 되기 전에 낳았다고 하셨으니, 제 느낌에는 아무래도 사시같기는 합니다. 

1-20세: 어린 시절의 저는 조용하고, 어른스럽다는 평을 듣는 아이였습니다. 한편 엄마만 아는 속고집도 꽤 강한 아이였지요.
저는 어린 시절 활자 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고, 그림 그리는 일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책을 읽고는 혼자 속으로 주변을 우습게 아는 좀 재수 없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저의 책사랑은 쭉 이어져, 중고등 시절에도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고, 책만 읽어댔습니다. 성적이 크게 나쁘지도, 대놓고 반향하지도 않았기에, 주변에서는 저를 별 문제없는 아이로 봤을 겁니다.
하지만, 입시공부 보다는 딴 짓 (주로 책 보고, 영화보고 하는, 꽤 건전한) 에 열중하는 바람에 고3 첫 모의고사에서 어마어마한 점수를 받고는 현타가 와서 벼락치기 끝에, 재수까지 거쳐서 92년,제가 원하는 대학 건축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저의 성격적 특징은 인간관계는 매우 좁고, 자존심 세고, 체면 구기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괴팍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시던 일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시절 좀 암울하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20-40세: 대학 입학 후 신나게 술마시고, 노래하고, 공부는 별로 하지 않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공에 흥미가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이 좋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놀아도 취직이 가능한 시절이었기에, 96년 졸업후 바로 취직하여 98년 5월까지 일했습니다. 98년 9월, 무술일주 남편(70년 7월 17일 미시)과 결혼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고, 예술적 기질이 강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교 선후배 사이로 만났고, 서로 너무 결이 달라서 결혼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습니다. 어쩄든 2016년 갑작스런 병으로 떠날 때까지, 2000년 딸 갑진일주, 2008년 아들 갑진일주, 2009년 아들 경자일주 세 아이를 낳고, 18년 간 함께 했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스케일이 크고,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학위과정이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유럽 생활은 쉽지 않앗습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2010년 12월 남편은 학위를 마쳤고, 우리 가족은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 과정에서 첫 아이를 키우며, 석사 디플롬을 마쳤고, 미래를 모색하던 중 아이를 연속해서 둘이나 낳게 되었습니다.

40-지금: 귀국 후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귀국하니, 시어머니께서는 파킨슨 병을 앓고 계셨고, 아버지께서는 제 귀국 다음날에 간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남편의 부모님께서 거주하시는 충청도에서 시부모님의 집에 들어가서 약 10개월 간 살았습니다. 저는 아직 18개월이던 막내 부터,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 든 큰 아이, 아프신 어머니, 가부장적인 시아버지, 미래가 불안한 남편 틈에서 매우매우 힘 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암환자 아버지 걱정도 했었지요. 당시 성당 미사에 참례할 때면, 너무 눈물이 나서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2011년 말 갈등을 겪다가, 결국 시댁에서 나와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 남편은 강원도의 대학에 임용되었고, 저는 충청도에 머무르며 주말 부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부터 인근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게 되었거든요.
2013녀 4월 결국 아버지의 암이 전이되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고, 따르는 딸이었습니다. 많이 슬펐습니다.
2016년 남편이 혈액관련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직전 2016년 봄, 많은 고민 끝에 강원도의 남편 거주지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병이 위중해진 이후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남편의 병을 간호했습니다. 
2016년 여름 낯선 도시에, 아이 셋과 함께 남겨졌습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그는 가고, 우리는 남아 강제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었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아이들의 밝은 생기 덕분에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 여름 우리는 계곡으로 바다로 자주 물놀이 갔었습니다.
2018년 10월 엄마가 갑자기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서 저를 써포트해주실 수 있는 온니원 엄마가 그렇게 가셨습니다. 사실 어머니와 저는 그리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남편의 죽음이후 어머니께 많이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2019년 3월 다시 충청도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큰 아이의 대학 입시가 나름 성공을 거둔 김에 그래도 주거비 부담이 만만하고, 아이들의 든든한 빽이 되주실 수 있는 조부모가 계신 곳 근처로 다시 오게 된 것 입니다.
2019년 4월 오랜 병환 끝에 시어머니꼐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래 고생하셨기에 슬프기는 했지만, 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었지만 현재 불행하게만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단 보석같은 아이들이 있고, 2011년 이후로 비정규직이지만 학교에서 강의하는 일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2019년 부터 도시관련 박사학위도 시작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이 키우느라, 또 여러가지 일들에 시달리느라, 제 직업적 일에 진지하게 노력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박하기도 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면, 뭔가 집중할 것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통장 잔고를 긁어 모아, 박사학위도 하고, 자격증 시험에도 도전하려 합니다. 나이도 많고, 객관적으로 보아 비젼이 딱 보이는 길은 아니지만, 일단 움직여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강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여쭙고 싶습니다. 공부 자체는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

또 기왕 건축 전공인데 돈도 좀 많이 벌어서 마음대로 집도 지어 보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4대문 안에 걸어서 갈 곳 많은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 

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제게 필요한 것들을 일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가 잘 되지 않지만, 여러 차례 가까운 이들의 가시는 길을 곁에서 뵙다 보니, 인생 짧고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 용기 내 봤습니다.

PS: 대운수가 제가 알고 있던 것 보다 10년 씩 빠릅니다. 의문이 생기네요...



 

이스턴샤인2020.08.31 23:39

안녕하세요~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으니 이제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철공소만세력의 1대운을 적용하면 지금이 기축대운이라 편인의 기운이 와서 공부를 하시나 봅니다. 공부하신 것으로 다음 겁재대운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시면 좋겠습니다. 공모전 처럼 경쟁해서 뽑히면 기회가 주어지는 것들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잘 준비하셔서 멋진 건물 지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