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다시 한번 강조해 말하지만, 음양오행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변화다. 우주의 모든 것은 생성과 더불어 운동하고 그 운동이 멈추면 소멸한다. 만고불변의 것은 없다. 이 말은 이미 주어지거나 결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음양오행의 우주원리론에 바탕을 두고 인간과 인간의 삶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세워진 명리학이 ‘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이며 다름 아닌 ‘혹세무민’의 시작이다.


무엇보다도, ‘운명’(運命)이라는 말 자체가 운명 결정론을 거부한다. 명(命)은 그 뜻대로 생명이며 세상에 나온 자로서의 소명이다. 한편, 운(運)은 군대를 지칭하는 군(軍)과 달릴 주(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한자다. 곧 전장에서 이동을 거듭하는 군대의 형상을 말함이니, 어떤 군대의 이동이 예측 가능하다면 그 군대의 결말은 보나 마나 전멸일 것이다.

 

또한 ‘운’은 옮기다, 움직이다, 쓰다, 궁리하다, 회전하다, 운전하다, 운영하다라는 뜻의 동사이기도 하니 운명이라고 하면 ‘명’을 운용하는 행위 혹은 그것을 쓰는 방법을 뜻한다.

 

맥락의 앞뒤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도 운명 결정론이 여전히 현실에선 어둠 속에서 득세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미래 예측술로서의 권력의 문제. 알 수 없는 미래를 알고자 목말라하는 이에게 확신의 권위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역술의 존립 근거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공포(恐怖)가 결정론의 공포(空砲)를 남발하게 한다. 어차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미래의 결과를 단순화하면 결국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확률 ‘50 대 50’ 아니겠는가?

 

게다가 다급한 상담 의뢰자는 결론만 빨리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빨리빨리’의 세태와 타협해야 하는 역술시장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을 차분하게 점검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습 무당이 한 공동체 마을의 정신적 안정을 책임졌던 봉건시대 인간 간의 정보 공유와 감정적 소통은 불가능하다. 오랜 대화를 통해 무의식의 심연 속에 숨은 억압의 정체를 추적하는 프로이트적인 상담법이 거개의 정신과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과정이 생략된 결론 도출은 결정론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운명 결정론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던 더 큰 원인은 이미 자신의 의식 속에서 포기하거나 패배해버린, 혹은 마지막까지 요행을 기대하려는 대중의 집단적 자학의 몫이 더 크다. 가난할수록, 그리고 비판적 이성의 능력이 저하될수록, 그리고 나이가 많을수록 자신이 속한 피지배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정치적 역설은 명리 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라는 자조는 미약한 주체와 압도적인 상황 사이의 역동적 가능성을 단숨에 무장해제한다.



이런 결정론적 명리학은 은연중에 한 사람의 명식을 귀격이니 천격이니, 그릇이 크네 작네, 용신이 유정하네 무정하네 운운하면서 수직 계열화한다. 이것은 공화국 시대에 살면서 봉건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는 많은 이들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명리학이 천년 전 봉건적 신분 사회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이 지배계급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봉사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진화하면 관점도, 프레임도 이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해석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학문이 될 자격이 없는 억지나 교조이거나 얄팍한 현혹에 불과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공화국 시대의 명리학이란 무엇인가? 놀랍게도 동양의 인문적 사유는 저 왕조시대에 이미 미래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근원을 마련해 놓았다. 인간의 운명을 우주의 원리론에 입각하여 사고했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우주와 같은 존엄한 본질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우주에 없는 가치의 우열과 위계를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속물적인 의도가 개입하는 퇴행 아니겠는가?

 

봉건시대의 얼마나 많은 도그마들이 과학기술혁명의 도래와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갔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시대를 뚫고 명리학이 아직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숱한 오해와 속물적인 이탈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설득력이 여전히 유효함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명리학은 그저 길흉을 점치는 미래예측 기술이 아니다.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인간이 지닌 다양한 욕망의 스펙트럼을 밝히는 것이 명(命)이라는 각각의 주체의 텍스트(text)라면 그 주체의 텍스트를 에워싸고 있는 콘텍스트(context)의 역동적인 기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운(運)에 해당한다. 주체의 속성으로서의 명과 주체의 복합적인 환경으로서의 운. 한마디로 명리학은 주체로서의 자아를 탐구하는 한편으로 그것의 실천적인 전략전술론을 수립하려는 동양적 인문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음양오행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명(命)을 파악하고자 발전한 개념이 십신(十神)이다. 십신은 전략전술론으로서의 운(運)을 수립하기 위한 개념인 용신(用神)과 더불어 명리학을 떠받치고 있는 양대 주춧돌이다. 이제 십신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한겨레 [ESC]  강헌의 명리하게 2018.05.03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431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