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이승만, 본래 자유 예술가가 맞는 인물

이승만 전 대통령 명식
 
수는 겨울의 기운이다. 모든 생명은 다시 죽음이라는 무(無)의 어둠 속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여야 한다.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숙명에 대한 그윽한 성찰,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에 대한 동경이 수의 본질을 이룬다. 독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후기 작품이나 특히 사주에 수 기운이 강했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이 분만해내는 분위기가 수의 감수성이라고 보면 되겠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말이 있듯이 흔히 수는 인의예지신 중에 지(智), 지혜 혹은 지성의 기운을 상징한다. 지(智)는 현상의 거죽을 뚫고 들어가 보이지 않는 속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힘이다. 그래서 예부터 공부에서 성과를 내려면 명식에서 수의 기운이 어느 정도 선명하게 흘러야 한다는 속설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목과 화, 토와 금의 예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수의 지혜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현혹하는 권모술수의 힘으로 기능하기도 하고 우리가 흔히 ‘잔머리’라고 부르는 요령의 모습도 지닌다. 확고한 특징을 지닌 다른 오행에 비해 수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가문 땅을 적시는 생명수로 내리기도 하지만 꽁꽁 언 얼음의 고체 성분이 되기도 하고 열을 받으면 수증기처럼 기체로 화하기도 한다. 가장 보편적인 형상이랄 수 있는 액체로서도 수는 자신을 담는 용기에 따라 형체가 변화한다. 은둔, 변신, 예측 불가능성, 속을 알 수 없음이 수의 또 다른 본성이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이런 연유다.


하지만 지혜보다도 앞서는 수의 본질은 나는 생식과 상상력이라고 본다. 수는 겨울과 밤의 기운이라고 했다. 절멸의 근원적 공포 속에서 모든 생명은 자신은 없어지더라도 자신의 영속을 담당할 후손을 낳으려는 종족 보존의 본능을 밤에 수행한다. 예술을 포함한 모든 창조적인 행위 또한 이 불멸을 향한 꿈의 결과물인 것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명식을 보자면 가장 결여된 오행이 수다. 실제로 서구의 다른 정치 지도자의 명식을 보더라도 수의 기운은 현저히 희박하다. 공개적이고 투명하며 현실적이어야 하는 최고 통치권자의 속성과 이 오행의 기운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역술가인 박청화의 책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인간 조직의 위계를 오행적으로 보았을 때 지지(地支. 명식의 하단)의 금 삼합(사-유-축)의 기운이 우두머리를 차지할 때 가장 빛나고 화의 삼합(인-오-술)은 중간 관리자일 때 가장 활성적이며 목의 삼합(해-묘-미)은 가장 아래 직급일 때 빛나는 성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의 삼합(신-자-진)은? 박청화는 수의 삼합 기운은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기운으로 본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조직이 위기에 빠졌을 때 긴급 투입되는 용병, 곧 지위를 물을 수 없는 프리랜서가 가장 적합한 기운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조직에 오래 머물면 사달이 난다고 유머 있게 말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하여 많은 프리랜서, 천생 프리랜서인 작가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단독 자영업자들에게 ‘신-자-진’ 수국이 많이 포진되어 있음을 임상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틀과 어울리지 않는 이들은 권력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첨부한 명식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2년간 장기집권 끝에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의 명식이다. 최고 권력자의 명식으로는 예외적으로 수의 기운이 강하다. 정화 일간이 묘월 봄에 태어났으니 이를 목화통명(木火通明)이라 하여 지극한 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허약한데 권력을 향한 수 관성의 과도한 기운이 균형을 무너뜨린다. 만민공동회 집회를 열광시킨 청년 연사로 화려한 커리어를 시작하여 식민지 시대 힘든 망명의 기간 동안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딴 그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이 박사’라고 불렀다. 공부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자원을 권력의 획득에 쏟았다. 실제로 그는 수 대운이 들어오던 1919년 상해 임시정부와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것은 모두 정치적 경쟁자들보다 몇 발짝 앞서 노회한 정치 역량에 기인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민주공화국의 기틀만 공고히 하고 헌법대로 재선 이후 물러났으면 그래도 국부로서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그는 1954년 그의 심복 이기붕이 주도한 어이없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을 향한 노욕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만다.


그리하여 1960년, 이때 신미 대운은 해묘미 삼합으로 은인자중해야 할 때 그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서 무투표 당선되었고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화되면서 권좌에서 내려와 초라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권모술수로 쌓은 권력의 허망한 종말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그의 비극의 동반자였고 3·15 부정선거의 원흉인 당시 부통령 이기붕의 명식은 병신-신축-경진-경진. 네 개의 주에 금 오행이 관통하는 강고한 금전 왕의 명식이다.



한겨레 [ESC] 강헌의 명리하게 2018. 04. 19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412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