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20세기 한국 명리학의 태두는?

 

 

 

 

겁재나 상관만큼은 아니지만 편인도 십신 중 4흉신의 하나로 꼽혀온 애물단지 십신이다. 하지만 여기엔 문관 우위라는 오랜,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전통이 개입하고 있다. 사대부가 지배한 왕조시대에서 정관에서 정인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관인생(官印生)의 흐름이야말로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인성은 인의예지신 중에서 어질 인에 해당하며 학문과 통찰의 십성이다.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강하고 본질에 대한 성찰 능력이 뛰어나며 끈질긴 인내심이 특징이다. ‘치우친’ 인성인 편인은 인성의 이러한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삐딱한 모습으로 현상한다. 즉 주류적이기보다는 비주류적인 대상에 관심이 크고 조직적이기보다는 개인적 특성이 강하다. 하지만 동시에 편인은 일간인 주체, 즉 ‘나’를 직접적으로 돕는 강한 힘이어서 편인은 강한 개성, 혹은 우리가 ‘끼’라고 부르는 타인과 차별화하는 기운이 강하다.

 

이런 속성 때문에 여성의 명에서 편인이 강하게 작동한다면 남존여비 같은 패러다임을 무시할 힘도 있어서 기생 사주라는 편견이 오랫동안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는 법이다. 이 ‘기생 사주’라는 편인은 오늘날 모든 청소년이 선망하는 연예인의 기운으로 거듭난다. 한마디로 사주 반전이다.

 

하지만 편인의 본령은 연예인이라기보다는 인성 본연의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활인업, 글자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직업 분야에서 빛난다. 의사, 약사, 간호사, 상담사, 역술가 같은 의역학 분야가 바로 이 분야이다. 그리고 정밀한 분석력을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링 분야 또한 편인의 주력 영역이니, 오늘날 이과 분야가 이에 해당한다. 사실 오늘날 촉망받는 의약학 분야도 백 년 전엔 중인 신분에 머물렀고 공학도 따지고 보면 평민의 영역으로 특권 계급이 누렸던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오늘날에는 입시 동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과대학은 압도적인 선호 1순위이며 공학은 문명 진화의 견인차가 되었다. 훌륭한 의사에게서 편인의 강한 기운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의 명식을 보자. 사고 깊이와 너비가 남다른 임자 일주에 인성이 중중한, 이 신강한 명식은 연주 편인이 강하게 뿌리를 내려 편인의 힘으로 일주 임자의 기세가 등등하다. 평안북도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은 조부로부터 조기 교육을 받은 이 명식의 주인은 20세기 한국 명리학의 태두인 자강 이석영이다.

 

명리학이 동양의 인문학으로서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한반도 격동의 역사에서 그는 어둠의 명성에 만족해야 했으나 그가 쓴 여섯 권짜리 <사주첩경>은 중국과 일본에 뒤지지 않는 20세기 명리학의 고전이 됐다. 그의 어린 시절, 혼기에 찬 누이의 배필을 두고 아버지가 가문 좋고 학력이 좋은 이웃 마을의 청년을 사위로 골랐는데, 조부가 사위 후보가 단명할 사주라고 말렸으나 그의 스펙이 마음에 든 아버지가 결혼을 강행했다. 혼사를 막지 못한 그의 조부는 청상이 된 어린 손녀가 자신의 무덤에 와서 통곡할 것이 가슴 아프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그 얼마 뒤 조부의 불길한 예언대로 젊은 매형이 급서해서 누나가 조부의 산소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어릴 적의 충격적인 경험이 그를 역술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분단으로 혼란스러운 1948년 을유대운에 그는 서울로 와서 역술인의 길을 걸었다. 35 편재 병술 대운은 그의 절정기. 그를 찾아 밀려드는 내담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해대운이 들어오면서 해수가 화 재성을 해치게 되었고 재물 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말년으로 가며 조금씩 곤궁해졌다고 전하는데 무자 대운에 이르러서는 자오 쟁충이 되면서 용신 오화가 완전히 사라졌고 다시 물의 기운이 들어오는 계해년에 세상과 이별했다. 역술가로서는 역발산의 기세를 지닌 강한 명국이었으나 대운이라는 시류의 힘이 그 기세를 지속적으로 무장 해제시켰다고 본다.



그에 이어 한국 3대 명리학자 중의 일인으로 꼽히는 도계 박재완도 편인과 정인이 중중한 명식인데 이 많은 인성을 제압할 재성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이른바 무재 사주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명식의 본분을 정확히 파악하여 재물을 좇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실권자들을 고객으로 두어 얼마든지 재물을 취할 수 있었지만, 재물을 탐하다간 자신의 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구십 평생에 집 한 칸 간신히 유지하며 선비와 같은 고결한 품격을 유지하여 후세의 존경을 얻었다. 아는 것을 지키는 것, 쉽고도 어려운 화두이다.



 

한겨레 [ESC] 강헌의 명리하게 2018. 10. 26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675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