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음 속에 양이, 양 속에 음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인간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모두 죽는다. 인간이라면 불행을 원치 않지만 거개의 사람은 수많은 이유를 들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외침과 내환으로 민초들의 삶이 고달팠던 조선 후기, 백년이 넘도록 스테디셀러가 두 권 있었다니 그것은 안방의 <토정비결>과 사랑방의 <정감록>이다. 세밑이 되면 아낙들은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신과 가족의 길흉을 점치며 돌아오는 새해엔 건강과 복록이 넘치길 기원했고, 사랑방의 남정네들은 모순과 불의로 뒤덮인 세상을 뒤엎고 그 뒤로 펼쳐질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을 꿈꾸었다.
 

하나는 <주역>에 기반한 은밀한 비책을 담은 비결서고 또 하나는 풍수지리설을 포함하여 갖가지 도참사상을 끌어모은 예언서지만 두 권 모두 동양의 사유 체계의 뼈대에 해당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책이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사주 명리 또한 이 동양의 근본 개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천년 전에 중국에서 틀을 갖춘 명리학이 첨단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명리학은 전생의 인연이나 내세의 구원엔 관심이 없다. 비록 속물적인 시장의 요구에 침소봉대하여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명리학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조화와 중용을 통한 근원적인 행복의 추구에 있다. 삶의 주체가 행복하지 않으면 우주 만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직 공부에 미천한 내가 알아갈수록 동양의 예지가 빚어낸 음양오행은 정말이지 깊고도 담백하며 오묘하면서도 선명하다. 그래서 나는 음양오행 중에 음양의 얘기로 먼저 시작하려 한다. 아시다시피 음양오행론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발아하기 시작한 동양의 우주원리론이다. 이것은 단순히 저 머나먼 우주의 본질에 대한 개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운명을 규명하려는 인문학과 모든 생명체들의 거주 공간인 땅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풍수지리학에서 인간의 몸을 다루는 의학까지 그 근원을 이룬다. 한마디로 동양적 사고의 핵심이며 이제는 서구의 융 심리학과 양자물리학에서도 포섭하는 전 지구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국기 한가운데에 자리한 태극의 이미지는 바로 이 음양론의 표상이다. 이 원의 이미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우주의 천지 만물은 음과 양의 작용으로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어둠과 빛, 땅과 하늘, 암컷과 수컷, 부드러움과 단단함, 수비와 공격, 우파와 좌파….
 

하지만 동양의 음양론은 그저 대립적 이원론이 아니다. 태극 원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곡선을 따라가 보자. 양의 기운이 충만해지면 음의 기운이 시작되고 그 음의 기운이 극단에 달하면 양의 기운이 다시 생성된다. 즉 이 형상이 의미하는 바는 음과 양은 태극이라는 하나에서 분리된 대립적인 두 개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기운이 가득하면 나머지 기운이 생성하기 시작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된다는 것. 나아가 음 속에 이미 양이 있고, 양 속에 이미 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양중음 음중양의 개념이 카를 융에게 강한 영감을 주어 ‘아니마’(남성 속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 속의 남성성) 이론으로 싹틔웠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고 극좌파는 극우파와 통한다는 자연과 인간의 이치가 이미 음양론 안에 있다. 따라서 음양론의 핵심은 대립이 아니라 변화, 그것도 ‘무궁한 변화’인 셈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선과 악이 모두 스승’(善惡皆吾師)이라고 갈파했다. 세상을 천사와 악마로 나누는 미국의 기독교주의적 세계관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양은 발산의 기운이고 음은 수렴의 기운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양을 선호한다. 양은 생성이고 음은 소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양이 음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면 우리는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명리학의 고전인 <적천수>는 음과 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파한다.
 


 

五陽從氣不從勢(오양종기부종세) 五陰從勢無情義(오음종세무정의)
 

양은 기(氣)를 따르지만 세(勢)는 따르지 않고, 음은 세(勢)를 따르니 정(情)과 의(義)가 없다. 굳이 지금의 어휘로 번역하자면 양은 현실의 판도를 도외시하고 본능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반면에 음은 인간적인 정과 도리를 무시하고서라도 현실적인 힘을 추구한다는 말이겠다. 다시 말하자면 양의 기운은 멋져 보이지만 허세이기 십상이며 음의 기운은 손가락질받을 일도 서슴지 않지만 제 실속을 먼저 챙긴다는 것이다. 명리학은 우주원리론을 인간의 운명론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중국인들의 놀라운 현실 인식을 이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 두 개의 명식이 있다. 하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식으로 알려진 것이고 나머지는 그의 오랜 벗이자 지금의 대통령인 문재인의 명식이다. 이 두 명식은 음양의 본질을 사고하는 데 있어 많은 것을 음미하게 해준다. 일단은 그냥 보자.
 



한겨레 [ESC] 강헌의 명리하게 2018. 02. 22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33163.html